세계 도처에 퍼진 최면도 20세기 초반에 이르러 프로이트Sigmund Freud(1856~1939)의 정신분석이 세인의 주목을 끌게 되자 점차 의학계에서 밀려나 무대에서 구경거리로 흥행하는 정도로 타락해 버렸다.
최면의 타락은 단순히 정신분석 때문만은 아니다.
근세에 들어서며 급속히 발전한 약물요법의 영향도 크다고 볼 수 있다.
약물마취제가 나오기 전까지는 최면이 유일한 마취수단으로 긴요하게 이용되었으나 마취약이 등장하며 최면은 수술대에서까지 물러나게 했다.
프로이트는 윈Wien 대학에서 정신의학을 전공하고 신경증에 대한 당시의 치료법이 임상적으로 아무 효과가 없음을 통감하고 있었다.
당시 파리에서 샤르코가 히스테리 환자에게 최면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1885년 프로이트는 샤르코를 방문하여 최면을 배웠다.
윈에 돌아와서는 브로이어Josef Breuer(1842~1925)와 함께 히스테리에 대한 최면요법을 연구하였으나 임상의학 면에서는 브로이어가 훨씬 우수하였다.
브로이어는 프로이트와 함께했던 안나 O.Anna O.에 대한 연구에서 그녀의 증상에 대한 원인을 밝혀낸다.
프로이트의 최면이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가는 브로이어와의 공저 “히스테리의 연구”중에서 프로이트가 에미 폰 N. 부인에게 최면을 시술한 광경의 기록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프로이트는 에미 부인의 눈앞에 손가락을 내밀고 “자라…” 라고 외치며 황홀한 잠과 증상소실의 암시를 주었다고 한다.
이런 유도법은 무대최면이면 몰라도 임상실험에서는 흔히 쓰이는 방법이 아니다.
프로이트는 최면이 환자의 저항을 받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으나, 이렇게 강경한 방법으로는 저항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최면요법은 명령이나 강제하는 것이 아니고 환자와의 협력적 참가에 의해서 좋은 인간관계를 만들고 그 생각에 영향을 주자는 것이다.
“증상의 소실”을 암시하는 것도 당시 흔히 사용되던 방법이지만, 이것만으로는 효과의 영속성에 문제가 있으며 이러한 점에서 최면의 효과는 일시적이라든가 근본요법이 아니라는 비판이 생겼다.
그러나 오늘의 최면요법에서는 최면 중에 환자의 심리를 해명하여 환자에게 진정한 통찰력을 얻게 하는 방법을 쓰고 있어 옛날처럼 암시로 증상을 억압하는 단순한 방법을 쓰지 않는다.
프로이트가 최면에 어느 정도 소질이 없었는지는 다음과 같은 학자들의 기록에서 알 수 있다.
Shealy(1996)는 프로이트가 최면에 ‘소질이 없었다(He was unskilled, p.112)’라고 기술하였다.
LeCron(1964)는 ‘서투른 최면사(poor hypnotist, p.71)’라고 했고, ‘그의 최면기법은 불행하게도 직접적인 방법을 통하여 암시만을 사용하는 유치한 방법이었다.’(Simpkins & Simpkins, 2000, p.19)라고 기술되어 있었다.
프로이트가 정신분석이라는 이론을 세우는데 최면을 바탕으로 했음은 의심할 수 없다.
단지 프로이트가 최면을 더 깊이 구사할 수 없었기에, 그는 최면을 버리고 자기 나름대로의 이론을 만들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