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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9-18 18:38
최면의 역사 : 4. 최면과 정신분석의 탄생
 글쓴이 : 편한마음상담연구원
조회 : 1,800  
       

세계 도처에 퍼진 최면도 20세기 초반에 이르러 프로이트Sigmund Freud(1856~1939)의 정신분석이 세인의 주목을 끌게 되자 점차 의학계에서 밀려나 무대에서 구경거리로 흥행하는 정도로 타락해 버렸다.

​최면의 타락은 단순히 정신분석 때문만은 아니다.

​근세에 들어서며 급속히 발전한 약물요법의 영향도 크다고 볼 수 있다.

​약물마취제가 나오기 전까지는 최면이 유일한 마취수단으로 긴요하게 이용되었으나 마취약이 등장하며 최면은 수술대에서까지 물러나게 했다.

 

프로이트는 윈Wien 대학에서 정신의학을 전공하고 신경증에 대한 당시의 치료법이 임상적으로 아무 효과가 없음을 통감하고 있었다.

​당시 파리에서 샤르코가 히스테리 환자에게 최면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1885년 프로이트는 샤르코를 방문하여 최면을 배웠다.

​윈에 돌아와서는 브로이어Josef Breuer(1842~1925)와 함께 히스테리에 대한 최면요법을 연구하였으나 임상의학 면에서는 브로이어가 훨씬 우수하였다.

​브로이어는 프로이트와 함께했던 안나 O.Anna O.에 대한 연구에서 그녀의 증상에 대한 원인을 밝혀낸다. 

 

프로이트의 최면이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가는 브로이어와의 공저 “히스테리의 연구”중에서 프로이트가 에미 폰 N. 부인에게 최면을 시술한 광경의 기록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프로이트는 에미 부인의 눈앞에 손가락을 내밀고 “자라…” 라고 외치며 황홀한 잠과 증상소실의 암시를 주었다고 한다.

​이런 유도법은 무대최면이면 몰라도 임상실험에서는 흔히 쓰이는 방법이 아니다.

​프로이트는 최면이 환자의 저항을 받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으나, 이렇게 강경한 방법으로는 저항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최면요법은 명령이나 강제하는 것이 아니고 환자와의 협력적 참가에 의해서 좋은 인간관계를 만들고 그 생각에 영향을 주자는 것이다.

“증상의 소실”을 암시하는 것도 당시 흔히 사용되던 방법이지만, 이것만으로는 효과의 영속성에 문제가 있으며 이러한 점에서 최면의 효과는 일시적이라든가 근본요법이 아니라는 비판이 생겼다.

​그러나 오늘의 최면요법에서는 최면 중에 환자의 심리를 해명하여 환자에게 진정한 통찰력을 얻게 하는 방법을 쓰고 있어 옛날처럼 암시로 증상을 억압하는 단순한 방법을 쓰지 않는다.

​프로이트가 최면에 어느 정도 소질이 없었는지는 다음과 같은 학자들의 기록에서 알 수 있다.

Shealy(1996)는 프로이트가 최면에 ‘소질이 없었다(He was unskilled, p.112)’라고 기술하였다.

LeCron(1964)는 ‘서투른 최면사(poor hypnotist, p.71)’라고 했고, ‘그의 최면기법은 불행하게도 직접적인 방법을 통하여 암시만을 사용하는 유치한 방법이었다.’(Simpkins & Simpkins, 2000, p.19)라고 기술되어 있었다.

 

 

프로이트가 정신분석이라는 이론을 세우는데 최면을 바탕으로 했음은 의심할 수 없다.

단지 프로이트가 최면을 더 깊이 구사할 수 없었기에, 그는 최면을 버리고 자기 나름대로의 이론을 만들었을 것이다.